우리나라의 역사는 뿌리 역사 7천년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고대사를 잃어버린 그 악업으로 근세 역사까지 왜곡되고 은폐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보는 두 눈을 잃어버린 셈이다.
잃어버린 근세사, 그 중심에 우리의 민족종교가 있었으니 바로 보천교普天敎(1916~1936)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탄압으로 절망에 빠져 있던 우리 민중들의 유일한 희망이 보천교였다. 지금 보천교에 대한 역사는 까맣게 잊혀졌으니 일본이 지워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 실로 다급한 일이다.
보천교는 증산도 제1변 부흥기에 증산상제님을 신앙한 교단으로 증산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차경석 성도가 전라북도 정읍 대흥리에 세운 교단이다.
보천교 역사를 보면, 처음에 교명을 선도仙道라고 했다. 보천교는 원래 강증산 상제님의 반려자 되시는 고高 수부首婦님이 창도를 하신 것이다. 강증산 상제님이 지상에 오셔서 9년 동안 가을 우주 새판을 열어 놓으시고 천상 보좌로 가시고 난 2년 뒤, 정확하게 증산도 연호年號로 도기道紀 41년, 1911년 음력 9월에 성도들을 모아 놓고 도판을 여셨다.
태모太母님 즉 고 수부님이 8년 만에 정읍 대흥리를 떠나시고, 교권을 장악한 차경석 성도가 1921년에 경상도 함양 황석산黃石山에서 대천제를 올리고 보화교普化敎라고 정했다. 조화를 널리 펴는 무궁한 조화법, 천주님의 조화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원형인데 이듬해 조선총독부에 공식 등록을 할 때, 천도교도 천 자를 쓰고 유교도 천을 중시하니까 보천교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태을주太乙呪의 수많은 기적이 터지면서 당시 조선의 인구 1800만 중 700만 명에 이르는 구도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대부흥 시대를 열었다.
1920년 주한 미 총영사관인 밀러가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보천교 자료에는 신도수가 6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정도 도세면 거의 나라의 국교國敎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 암울했던 시대에 민중의 마음속에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후천개벽’ 과 ‘지상 선경 건설’ 이라는 보천교 교리는 그야말로 구원의 복음이었다. 당시 태을교 또는 훔치교, 선도교로 불리던 이 종교단체의 수장은 차경석車京石이란 분이었다. 사람들은 교주 차경석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인으로 섬기며 ‘차천자車天子’라 불렀다.
차경석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증산도 도전道典 속에는 차경석 성도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차경석 성도는 본인도 동학의 간부였고 아버지(차치구)도 동학의 접주였다. 이미 10대 중반의 소년 시절에 정읍에서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어났던 아버지를 모시고 직접 전쟁터에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혁명가로서 역동적인 삶을 산 것이다. 그는 28세 되던 1907년에 증산상제님을 만나게 된다. 이후 인생이 바뀌게 되는데 상제님을 뵙자마자 신성함에 놀라서 줄기차게 모시기를 간청하다 결국 허락을 받고 그 이후로 줄곧 상제님을 모셨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에는 차경석이 교단을 주도하면서 전국에 걸쳐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포교 대부흥을 이루었다. 기유년(1909)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차경석 성도의 인물을 평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석은 대재大才요 만인지장萬人之長이 될 만하다. 너한테 일극一極을 주노라”(도전 3편 291장). 경석은 큰 격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다는 말씀이다. 상제님은 차경석 성도에게 과거 동학혁명 때 죽어간 30만 신명들의 해원 도수를 붙여 일세를 풍미하게 하셨다.
보천교는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을 계기로 산하 24방주가 드러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았는데, 그때 차경석 성도도 수배령이 내려지고 지리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게 되고 보천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종교와 사상단체의 본보기인 보천교 조직의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일제는 1922년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된 60방주의 한 사람인 이상호를 회유하여 교단을 정식으로 등록하도록 했다. 이에 이상호는 ‘보천교(원래는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명으로 등록하게 되는데 이로써 문제가 생기게 된다. 교명 등록과 동시에 이전의 ‘비밀결사 조직운동’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는 집요하고도 교활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보천교 신법」을 만들어 대규모로 교인들을 검거, 구속했는데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탄허 스님의 아버지)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
일제 당시 천도교, 대종교 등의 민족단체와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가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전개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증산상제님을 신앙한 보천교가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항일비밀 결사투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구 선생은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정읍을 방문하여 “임정臨政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고 하였다.
또 이승만 박사는 1946년 정읍을 방문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창하였다. 많은 빚은 무엇이며 왜 하필 역사적인 선언을 정읍에서 하였을까?
보천교는 한때 상해임시정부의 중요한 자금줄이었다. 보천교가 막대한 독립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교주 차경석 성도가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천교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1929년 정읍 대흥리에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큰 규모의 십일전十一殿을 비롯한 45동의 건물이 지어졌는데, 그 건축 비용이 자그마치 150만원이었다. 그 당시 쌀 한 가마니가 5원 30전이었으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흥리 일대는 당시 15호에 지나지 않았던 가구수가 1,500호로 급격히 늘어났다. 일제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파괴해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보천교 조직을 미신,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꾀하는 언론조작에 나섰다.
마침 세운世運도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며, 이후 보천교는 이와 같은 불비한 시운과 일제 치하 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급격한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세계 종교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부흥했던 보천교는 1936년 교주 차경석의 사망 이후 일제에 의해 하루아침에 해체되고 말았다.
웅장했던 성전인 십일전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과 정읍 내장사 대웅전, 전주 역사驛舍를 건축하는데 사용되었다. 지금 정읍의 보천교 성전 터를 가보면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주춧돌과 벽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급변할 때면 으레 민족운동이 일어나곤 하는데 항상 종교를 중심으로 발현되었다. 우리나라의 동학농민운동이 그랬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도 그런 유형이었다. 일제치하 항일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시 보천교를 중심으로 한 증산도 초기 교단들이었다.
최근 보천교의 발상지 정읍에서 향토사학자들과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보천교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보천교의 역사는 정읍이라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연구가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맥을 바로잡는 차원에서도 학계와 정부차원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보천교의 진실은 아직 역사 속에 묻혀 있다. 보천교의 역사가 밝혀지면 근대 역사의 진정한 출발인 동학의 참뜻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잃어버린 고대사와 원형문화를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월간개벽 상생칼럼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정읍의 보천교' (주미라)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