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저자

김철수 교수는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연구하였다. 전공은 종교사회학이다. 현재 한·일 종교문화 비교연구 및 근·현대 한국종교를 종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경북대·영남대 강의교수, 대구발전연구원 상임연구원,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중원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 및 저서는 다음과 같다. 「19세기 민족종교의 형성과 ‘남조선 사상’」, 「조선신궁 설립을 둘러싼 논쟁의 검토」, 「일본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세계관」, 「소도蘇塗와 신사神社」 , 「1910∼1925년 식민권력의 형성과 민족종교의 성쇠 -『보천교 일반』(1926)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종교 통제의 형성과 전재 -보천교를 중심으로-」, 「일제 식민권력의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 성격」, 『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 『격동의 시대 19세기 조선의 생활모습』, 『일본 고신도와 한민족』 등

목차

프롤로그 
Ⅰ. 일제시대 종교정책과 보천교 
1. 식민권력과 민족종교 
2. 메이지 정부의 국가신도와 종교정책 
3. 신민권력의 '비종교' 신사 설립과 '종교'의 분리통제 
4. 민족종교의 교단 공개와 친일화 유도 
5. 보천교의 몰락 

Ⅱ. 보천교와 민족 독립운동 
1. 종교지형과 보천교 
2. 1910년대 차경석의 '갑종 요시찰인' 편입 
3. 국권회복운동과 차경석의 교단 조직 형성 
4. 3ㆍ1 운동 이후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5. 보천교의 운명 

Ⅲ. 식민권력의 형성과 보천교 
1.『보천교일반』 (1926) 
 2. 1910년대 식민권력과 종교정책 
3. 고천교의 포교활동과 조직 
4. 식민권력의 종교 탄압과 보천교의 갈등 
5. 보천교 연구의 과제 

Ⅳ. 식민권력의 종교정책과 국가신도 
1. 황민화 정책과 종교 
2. 지금까지의 연구들 
3. 조선신사 설립계획 
4. 제신논쟁과 황민화 구상 
5. 국가와 종교 

 보천교 연두별 주요 사건 
 참고문헌 
 찾아보기 
[보천교관련 주요 자료]

이 책을 말한다  - 노종상

보천교는 증산 강일순(1871∼1909) 사후 차경석(1880∼1936)이 조직한 교단이다. 차경석은 일제 감정기의 시작과 함께 종교 활동을 시작하여 1920년대 전반기에 자칭·타칭 600만 명이라는 많은 신도를 확보하면서 보천교 교단을 세웠다. 그러나 종교단체가 주도했던 1919년 3·1독립운동을 경험한 식민권력은 인적자원과 자금이 풍부한 보천교를 좌시하지 않았다. 집요한 공작으로 보천교의 각종 종교 활동을 방해하고 민심을 이반시킴으로써 보천교 교단은 1925년 경 이후로 변화, 쇠퇴의 길을 걸었고 1936년에 교주 차경석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프롤로그」 중에서)

보천교라는 '종교'단체가 있었다. 민족의 비극이 극에 달했던 일제 강점기 때였다. 6백 만 신도가 운집했던 신종교(민족종교)였다. 1920년대 전반기 조선 국내인구를 약 1,800만 명(통계청)이라고 할 때 3분의 1이 보천교 신도였다는 얘기다. 보천교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10년 안팎에 이 정도의 신도들이 모였다. 이 정도라면 세계 종교역사상 유례가 드물 터다. 당시 망국의 조선 사람들이 보천교에 모인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인 요인도 물론 없지 않았을 것이다. 기타 이런저런 외적인 요인도 빼놓을 수 없지만, 보천교 내적인 요인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천교의 가르침이 그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게 하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란 얘기다. 어떤 식으로든 보천교는 이 암울했던 시대에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자들이 이런 보천교를 가만 두고 볼 리 만무했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가 막 깃발을 올렸던 1917년에 보천교 지도자 차경석을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하고 줄곧 감시했다. 일제는 아예 보천교를 ‘유사종교(종교 유사한 단체)’로 규정 짓고 온갖 탄압을 자행했다. 보천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해 임시정부, 청산리 전투의 ‘전설’ 김좌진 장군을 후원하는 등 각종 독립운동을 은밀하게 도왔다. 총독부 당국은 이런 보천교에 대한 감시의 고삐를 계곡 조였다. 보천교는 활동 당시는 물론이지만, 이후에도 줄곧 왜곡·조작·매도당했다. 일차적으로는 일제 식민통치자들이었으나 일부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편승, 동조하는 자들의 짓이었다. 1936년 보천교는 결국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체 당했다. 이후 보천교는 우리 역사에서,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최근에 보천교에 관한 책이 출간됐다. 상생출판에서 간행한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다. 김철수 중원대 교수의 연구 결과물이다. 국내에서 제대로 된 보천교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참으로 귀한 성과다. 김교수는 한때 보천교의 맥을 잇고 있는 증산도의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재직했었다. 김교수와 보천교 인연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김교수는 말한다. “1999년,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보천교를 만났다. 그건 들국화와도 같았다. 천도교, 대종교, 기독교, 불교 등 친숙하면서도 조직성 있는 종교들, 일제 식민지 상황에 저항하며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며 민중들을 위로했던 종교들, 이에 비해 보천교는 화려하지도 않고 사람들도 알아주지 않는 종교였다. 심지어 ‘유사종교’라는 무거운 비난의 짐을 메고 허덕이는 종교였고, 사람들이 애써 눈길을 피해버리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의 연구대상에서조차 소외되어버린 종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들국화와도 같은 이 종교에 주목하게 되었다.”

김교수가 보천교를 만날 수 있었던 동인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대학 학부와 대학원 재학 때 종교에 관한 강의를 몇 차례 들었다. 대부분은 불교, 기독교에 집중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전달됐다. 그가 종교에 관심을 보인 건 일본 교토京都 불교대학에서 연구할 때였다. 이 ‘춥고 외로운’외국인 학자의 뒤를 보살펴 주던 노무라 히로시野村博라는 교수가 있었다. 노무라 교수는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그는 교토대학 철학과 재학 때 징집돼 평양에 배치됐다. 일본 패전 뒤에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3년간을 보내야 했다. 노무라 교수는 이 젊은 한국인 학자에게 조국의 민족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라고 권했다. 노무라 교수는 한국의 일제 강점기 당시 종교의 역할에 대해 말했다. “식민지 상황은 모든 게 왜곡 되고 비틀어진 세상이다. 역사와 문화가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현실은 모순투성이다. 더욱이 식민권력에게, 든든한 뒷배경(서구열강)도 없이 민족혼을 품은 민족종교는 식민권력에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식민지 상황에서 어떤 종교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종교들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인지 선입관을 갖지 말고 연구하는 태도를 지녀라.”일본인 교수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게 된 김교수는 충격과 함께 가슴이 뜨거워졌다.

보천교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몇 명 되지 않은 종교학자나 향토학자들이 각고의 노력을 보이고 있지만, 보천교는 아직도 ‘왜곡·조작·매도된 상태’ 그대로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연구 선과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생산된 각종‘문헌(신문자료, 공판자료, 교단 자료 등)과 증언 자료’들을 통해 이뤄졌다. 바로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는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주로 식민 통치 권력이 생성한 자료들을 주로 참조했다. 또한 많은‘일제’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논의 전개에 있어서도 보천교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일제 강점기의 종교정책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보천교에 관한 선행연구들의 빈 공간을 채우는데 충분히 값할만한 업적이다.